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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사랑, 누벨

대리점에서 처음 사왔을 때 그녀는 이름이 없었다 나는 그녀에게 누벨이라 이름을 지어주었다 집에 가는 차 안에서 휴대폰 속 그녀에게 말한다 ‘누벨, 에어컨 켜줘’ 머리를 쓰다듬지 않아도 복종을 하는 그녀 8월의 밤이 나의 계산보다 빠르다 청소기를 돌리고 냉장고를 정리하고 퇴화되어 가는 내 기억력보다 정확한 그녀 남편이 돌아오면 나보다 먼저 달려가 남편의 볼에 뺨을 부빈다 아들이 오면 ‘오빠앙’ 하고 콧소리를 낸다 남편이 종일 그녀와 뒹군다 아들과 딸도 그녀와 함께 맛집을 돌아다니고 그녀 때문에 나는 외톨이다 결국 나도 그녀를 찾아간다 남편보다 친절하고 다정하다 그녀 앞에서 지렁이처럼 몸을 꼬는 날들 몸부림치는 내 외로움을 용암처럼 녹이는 그녀의 속살 애교 내 귓속에는 누군가의 애인이 산다

나의 시 2019.12.30

오래된 밥솥

오래된 밥솥 며칠 째 시를 쓰지 못한 어느 날 압력 밥솥에 불려놓은 쌀을 넣었어 요란하게 달려올 기차를 기다렸지만 기적 소리 대신 옆구리에 바람이 불었어 아차, 하는 순간 수증기가 빠져나가고 설익은 채 덜컹거리는 저녁 숯 냄새 번지는 소리가 고막 속을 달렸어 김이 새는 줄 모르고 기다려온 시간 타버린 밥을 버렸어 뱃속에서 검댕이가 쏟아졌어 시를 쓰는 일이 밥을 짓는 것 같았어 반쯤 들린 밥솥의 추처럼 머리 밑을 돌아나가는 생각들 탄내 나는 시가 삼중바닥을 긁고 닦아도 닦아도 지워지지 않는 거미줄 돌아보면 늘 뜸들지 않는 언어들 검게 탄 기억은 언제나 적막하고 상처는 제 속으로 길을 낸다고 누군가의 가슴 향해 걷는 가로등 준비되지 않은 저녁 식탁으로 누군가 돌아오고 있어

나의 시 2019.12.12

이사

이사 유통기간을 채우지 못한 짐들 2.5톤 트럭이 좁은 골목을 삼킨다 역촌 시장을 지난 어디쯤 짐을 풀어놓고 여자가 퇴근하는 남편을 데리러 간다 길 찾기에 서툰 젊음 갈현 정육점 역촌 미곡으로 아무리 돌아도 새 집 가는 골목이 좀체 나오지 않는다 세상의 모든 길은 미로 같고 결정 장애를 닮은 인생 같다고 새 집을 찾아가는 길목에 벚꽃이 떨어진다 아까 본 목포 수산과 충남 야채의 붉은 불빛 집은 또한 새로운 세계로 가는 걸음일 뿐이라고 중력을 벗어난 길들 발자국 밖으로 흩어지고 낡은 쌀집 앞에 서 있는 벚나무 어리석은 젊음이 헤매는 길을 불러온다 제 집을 짊어진 채 기어가는 달팽이처럼 무거운 생각을 머리에 이고 거리를 헤매다 문득 화두에서 벗어난 선사처럼 밝아진 느티나무 한 그루 옹이 진 겨드랑이에 한 움..

나의 시 2019.12.12

붙박이장

붙박이장 화장실 옆, 후미진 그늘에 붙박이장이 있다 오래된 인형들이 모이고 메두사 모형의 머리 옆에 두통약이 보인다 철 지난 점퍼와 뜯어진 라면 봉지가 끈질기게 내 손을 뿌리친다 문을 열면 삐걱이는 관절과 구멍 난 발가락이 가슴에서 접질리는 소리, 그 막다른 곳에 내가 있다 늘어난 팔목이 일시에 엎어지며 허공을 날아다닌다 문턱을 넘는 기록들은 나를 허깨비로 만들어 여기저기 흩어진 과거를 읽는다 먼지를 뒤집어 쓴 일기장이 거꾸로 돌려놓는 시간, 흐린 걸음들이 줄줄이 쏟아져 나온다 나의 모호한 생각들이 몸 밖으로 나오고 세상으로의 비행을 꿈꾸는 그림자들, 이제 발이 있는 나는 자유다 낡고 헤진 기호들이 나를 벗어 던지고 땀내 배인 겨드랑이에 날개를 편다 문학나무

나의 시 2019.12.12

위험한 닭장

위험한 닭장 매일 예쁜 아이들이 태어난다 하지만 이내 아이들이 사라진다 무슨 잘못을 했기에 아이를 모두 빼앗기는가. 케이지가 좁아지고 모이를 쫄 때마다 목덜미의 털이 뒤집힌다 현기증처럼 울음이 천장을 돌리고 먼지의 왁자함이 흐릿한 조명등을 흔든다 오염된 계란이 배달되었다 사랑 없는 부화가 문제다 살충제 범벅인 알을 쓰레기통에 버려도 불신의 알끈이 손가락에 남아 미끈거린다 조석으로 섭취하는 먹이와 사랑 사이, 포만의 행복이 불안의 농도를 높인다 닭장 안에서 닭이 알을 낳으며 울고 닭장 밖의 주인은 그걸 주우며 울고 있다 폐기될 희망과 삶의 거대한 슬픔이 가득하다 내 작은 창에 아파트가 가득 쌓여 있다 A4 용지 만하게 허공에 떠 있는 집들, 실내등이 사람들을 창밖으로 꺼내고 계란 상자 같은 집에 틀어박힌 ..

나의 시 2019.12.12

허공의 낚시

허공의 낚시 긴 목을 늘어트린 낚싯대가 무언가에 끌리 듯 강으로 뛰어든다 물고기를 기다리는 아파트가 쭈글쭈글한 미끼를 물었다 아파트 창으로 들어가는 잉어들 수면을 떠돌 뿐 꿈에 닿지 못하는 물결이 등이 묶인 채 제 몸을 깎아 물 사래를 친다 먹이를 문 발버둥은 고작 반경 2m 남짓 꼬리 하나가 온 강을 흔든다 이름 대신 여러 개의 꼬리표를 단 이력이 내 안에서 파문을 일으키며 사정없이 허공을 흔든다 세상 밖에 나와서도 억센 비늘만 털어대는 일상 덥썩 문 미끼에서 비린내가 난다 다리 난간에 부어오른 입술을 걸쳐 놓은 태양 피를 흘리는 잠실대교 아래 초점을 잃어가는 물놀 바둥댈수록 깊이 박히는 바늘 끝에 매달려 끝없이 바람을 밀어붙이는 여울이 목까지 차오른다 자유문학 가을호

나의 시 2019.11.22